선우용녀 딸 최연제 재혼과 이혼 이야기, 최연제남편직업 케빈고든과의 첫만남 그리고 결혼에서 출산까지 요산대학교 대학원 졸업 후 의사
최연제 재혼 후에 요산대학교 대학원 한의학 박사 자격증 취득을 한 뒤 불임전문 한의사로 유명해져, 결혼한지 10년 만에 아들 유빈 (미국이름 이든) 출산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행복해요"
호기심 많은 고양이 눈빛을 한 이 여자. 바로 90년대 청춘을 보냈었던 이들이라면 잊을 수가 없는 본명 김연재, 가수 최연제 나이 48세 입니다. 1993년도에 영화 OST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하여 시원하면서도 깊은 목소리로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던 최연제는 어느 날엔가 소리소문 없이 우리 곁을 떠난 듯 했습니다.
그랬었던 그녀가 과거에 모친인 탤런트 선우용녀를 다뤘었던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와 인생다큐 마이웨이로 근황에 대해 전했습니다.
TV 속에서 그녀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리처드 기어를 쏙 빼닮은 최연제 남편 케빈고든 나이 48세와 알콩달콩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길 위에서 서기까지 어떠한 여정을 걸어왔었는지, 스타의 평범한 일상은 과연 어떠한지 궁금증을 한가득 안고서 그녀의 패서디나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십 수 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은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여전히도 톡톡 튀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그녀 선우용여 딸 최연제와 함께했었던 한나절은 꽤나 유쾌하고 즐거웠습니다.
모범생에서 패션모델로
중학교 1학년 때인 1983년도에 LA로 가족 이민을 오게 되었다는 최연제 학창시절은 평범한 듯이 화려했다고 합니다. 1남1녀 중에 장녀였다는 최연제는 공부도 열심히 했었지만 베벌리힐스 고교 재학시절에 유일하게 동양인 치어리더 주장으로 활동했을 만큼 끼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미술쪽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최연제는 고등학교 졸업 후 파슨스 디자인스쿨에 합격하게 되었지만 자유분방했었던 학교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엄한 최연제 아버지 선우용녀 남편 김세명 반대로 인하여 입학을 포기했으며, 부모의 바람대로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여 산타모니카 칼리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타고났던 끼와 재능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동양인 여성으로는 보기가 드물었던 175cm라는 큰 키를 지녔으며, 이국적인 외모와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한눈에 알아챘던 모델 친구가 그녀에게 모델 일을 제안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타이라 뱅크스 등 톱 모델들이 소속되어 있었다는 모델 에이전시인 'LA모델'과 계약을 맺고나서 1989년부터 2년동안 모델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양인 모델이 많지가 않았던 당시에 그녀는 세인트존을 비롯하여 샤넬과 코카콜라, 메이시백화점 등 유명 브랜드들의 유일했었던 동양인 모델로 지면과 TV 광고를 비롯하여 패션쇼까지도 접수하게 되면서 유명 모델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당시 학생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의 돈도 많이 벌었어요. 충분히 만족하면서 공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 한국으로 돌아갔었던 엄마가 너무 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LA생활을 접고서 무작정 한국행을 택하게 되었죠."
대한민국이 사랑한 청춘스타
선우용여는 딸 최연제의 한국 연예계 생활에 대하여 극구 말렸지만 어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다고 했던가. 1991년에 1집 앨범의 실패 후에 쓰라린 고배 끝에 1993년에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되면서 최연제는 'LA에서 온 미녀스타'라고 하는 별칭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그녀는 각종 가요차트들과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 행진을 이어가게 되면서 정상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특히나 탁월했었던 영어 실력으로 인하여 당시에 내한을 온 할리우드 스타들의 통역들을 도맡아서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리포터로 인기를 얻으면서 예능 MC을 비롯하여 라디오 DJ, 뮤지컬 배우로도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잠도 못자고 하루에 20개가 넘는 스케줄들을 소화를 하면서 강행군을 했어요. 물론 교포라고 해서 왕따도 당해봤었고 엄마 선우용녀 후광을 업고서 낙하산이라면서 백안시 하는 이들의 틈바구니속에서 연예계 생활이 정말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주변 지인분들께서도 가끔 그 화려했었던 시절들이 그립지 않느냐고 물어 보시는데, 그 당시에 원 없이 활동해서 그런지 그런 생각은 전혀 안 들더라구요."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을 했왔었던 최연제가 어느 날에 갑자기 우리 곁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은 바로 미국에서 결혼소식과 함께였습니다. 한인 2세와 결혼하여 시애틀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던 그녀는 연예계의 활동은 접은 듯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2년 뒤에 우여곡절 끝에 최연제 이혼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녀는 못다 했던 학업을 위하여 시애틀 명문 아트스쿨인 코니시 예술대학에서 '클래식&20세기음악작곡'을 전공하면서 2001년에 우등졸업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졸업 후에는 2002년도에 LA로 오게 된 그녀는 라디오코리아에서 '최연제의 세이예스(say yes)'라고 하는 음악방송을 1년동안이나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환자와 공감하는 한의사
그녀는 2012년에 패서디나에 빔 웰니스(BEAM Wellness)한의원을 개업해서, 현재는 꽤 유명한 불임 전문 클리닉 한의사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수이면서 음악 전공자였었던 그녀가 한의학에 빠지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계기에 배우게 된 수지침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취미삼아서 배웠던 수지침을 통하여 지인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한의학에 매력을 느끼게 된 그녀는 2006년에 산타모니카에 위치한 요산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만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케빈고든과 최연제 재혼을하여 결혼한지 10년 만에 아들 유빈(미국명 이든)이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된 그녀의 재혼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 같습니다.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최연제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어 LA행 비행기 안에서 쪽지를 전달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는 남편의 짝사랑은 그 후에도 끈질긴 구애와 독학으로 배워서 곱게 접어서 건네준 종이학 101마리를 통해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에 성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케빈 고든 직업은 웰스파고 서부지역 본사에 수석부사장으로 재직 중에 있다고 합니다.
"남편 케빈고든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기 위하여 보냈었던 6년간의 긴 공부를 마칠 수가 없었을 거예요. 밤늦게까지도 공부만 했었던 저에게 항상 남편은 불평 한마디도 없이 격려를 아끼지를 않았거든요."
여성전문의인 그녀의 전문 진료과목은 불임 클리닉 이라고 합니다. 아마 불임이라는 진료과목은 그녀가 결혼 후에 쭉 아기를 갖고 싶어 했었지만 임신이 힘들었던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지 싶었습니다.
"맞아요. 임신을 미루고 미루다가 나이 40세에 막상 아기를 가지려고 하니까 힘들더라구요. 거기다 자궁내막증으로 인해서 수술을 했었기도 했고, 2년 뒤에 결국 인공수정을 시도해 보았는데 이 역시도 쉽지만은 않았어요. 무려 4번의 인공수정과 그리고 2번의 유산 끝에 7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불임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남일 같지 않아서 제 몸을 실험대상 삼아서 불임전문 한의사가 되었죠."
현재는 최연제는 LA 유명 불임클리닉 전문의가 그녀에게 환자를 보내게 될 만큼 주류사회에서도 불임전문 한의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